아름다운 끝맺음 즉, 아름다운 죽음이란? 오늘 현재의 삶을 통해서만 이뤄지는데 죽음의 정확한 때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이란 늘 가까이에서 삶과 함께 숨쉬고 있으며 인생에 가장 늦게 찾아와 주길 간절히 바라게 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같다. 또한 죽음은 나이, 건강 상태와는 무관하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레 닥친다. 바로 어제 만나서 얘기를 나눴던 친구가 그 날 저녁 도로를 건너다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던지, 이제 갓 스무 살 밖에 되지 않은 옆집 여대생이 암에 걸렸다는 등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처럼 죽음에 정해진 순서란 없다. 따라서 죽음이란 손 닿지 않는 아주 먼 곳에 있으며 훗날에나 다가올 일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없는 빈자리 ’를 한번쯤 생각해 보고 현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진정한 Happy-ending은? "영생에대한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 땅에서 100년도 체 안 되는 세월을 살면서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영혼을 보내신 이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확신을 가졌다면 돌아갈 곳에 대한 준비의 절반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죽음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영혼은 구원 받았으니 육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많은 경우에 몸이 깨지면 영혼이 깨지는 것을 우리의 삶에서 종종 보고 있다.
그토록 중요한 ‘영혼의 그릇’ 역할을 감당했던 육신의 준비된 처리야말로 인간 본질에 대한 마지막 의무요, 책임이며 영혼의 구원과 동일시 여기는 ‘Happy-ending’의 필수 조건인 셈이다.
우리는 태초와 종말을 운운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태어남과 또 마지막 생의 목적지가 되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 본적이 없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자신에게 대한 무책임한 처사 이며 우리를 만드신 이의 형상을 닮은 자신의 태어남에 의미를 모르는 것은 물론하고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가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3) 웰빙과 웰다잉의 관계
<현대>에 이르러는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증가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수명을 70대로 잡아 생명보험도 가입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는 90세, 100 세 시대에 자연사했을 많은 사람들이 암, 당뇨병, 뇌졸증, 치매 등의 병이나 불이의 사고등으로 의료 기계에 둘러싸인 채 여러 가지 튜브를 몸에 꽂고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머지않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심장 마사지 등 응급조치를 취하기 위해 가족들은 병실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라 할지라도, 오직 육체적 연명만을 생각해 응급실에서 ABC 조치 (AirWay: 기도 확보, Breathing: 산소인공호흡, Circulation: 혈액순환)를 취하면 몇 년간 생명을 붙들어 놓을 수 있다고 한다.
<환자>가 죽어 가는 순간 병원은 극도로 흥분된 광란에 휩싸인다. 환자를 소생시키려는 마지막 수단을 취하기 위해 일단의 사람들이 침대 곁으로 달려든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환자에게 무수하게 약을 투여하고 바늘을 찔러대고 전기 충격을 가한다. 그가 죽어 가는 순간 심전도, 피 속의 산소량, 뇌파 움직임 등등이 면밀하게 기록된다. 의사가 이제 그만 이라고 선언할 때에야 비로소 이런 히스테리는 막을 내린다.
보다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려는 환자의 가족으로서는,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죽음의 방식일까라는 의문이 자주 제기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어야 할지, 아니면 연명치료를 계속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붙들어 놓아야 할지 가족들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만일 회복의 희망이 조금도 없는 경우라면, 이런 식으로 난리를 피우면서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도록 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최후의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고민도 하게 된다. 위암 말기 환자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 입원실은, 환자가 의식을 잃은 뒤 숨질 때까지 48시간 내내 초상집 분위기였다. 환자는 이따끔씩 괴성을 질렀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몸을 벌떡벌떡 일으켜 세웠다. 가족들은 이를 저지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의 가족은 “우리에게 곧 닥칠 일이라 생각하니 너무 힘들다. 어머니가 저 소리에 놀라 얼마나 충격을 받을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다”고 괴로워했다. 이와 같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눈을 감을 수 있는 임종실이 거의 없어 환자와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죽은 후의 영안실은 날로 화려해지는데 임종실은 없다.
<임종>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당사자와 가족을 보살펴주는 임종문화도 없고, 근본적으로 죽음과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우리 사회에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최근 유행되고 있다. 웰빙이란 한 마디로 ‘행복’ 혹은 ‘잘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사람들은 웰빙을 단지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으로만 이해하는데, ‘잘 산다’라는 말에서 ‘잘’에 부여되는 의미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웰빙과 관련해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문제, 그러나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문제가 바로 죽음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 한들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지 못했다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웰빙을 웰다잉(Well-Dying)과 관련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흔히 행복한 삶, 건강한 삶만 생각할 뿐이다.
하지만 행복한 죽음, 건강한 죽음이란 말도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가 세속적으로 아무리 행복하게 살았을지라도, 그가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참된 의미에서 행복이란 바로 죽음에 있기 때문이다.
웰빙의 참뜻은 웰다잉에 있으므로, 이제 우리는 웰빙을 삶의 문제에만 한정시킬 게 아니라 웰다잉에까지 확대해야 한다. “내일이 준비된 자! 웰빙을 할 수 있다” 즉! 오늘을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